| “테레자는 인간의 근본적 체험, 즉 영혼과 육체 간의 화해 불가능한 이원성이 급작스럽게 드러난 상황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한때 인간은 그의 가슴 깊은 속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규칙적인 박동 소리를 듣고 놀라 기겁하며 이것이 무엇일까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육체처럼 낯설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물이 자신과 일체를 이룬다고 인간은 생각할 수 없었다. 육체는 껍데기고, 그 안에서 뭔가가 보고, 듣고, 두려워하고, 생존하고, 놀라는 것이다. 이 무엇, 남아 있는 잔금, 육체로부터 추론된 것, 이것이 영혼이다. 물론 오늘날 육체는 더 이상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다. 가슴 속에서 뛰는 것은 잘 알려졌다시피 심장이고, 코란 산소를 폐에 공급하기 위해 몸통에서 돌출된 파이프 끝에 불과하다. 얼굴이란 소화 작용, 시각, 청각, 호흡, 반사작용 같은 모든 육체적 메커니즘이 집결된 계기판에 불과하다. 인간은 신체의 모든 부분에 이름을 붙이고 난 후부터 육체에 덜 불안해했다. 또한 이제는 영혼이란 뇌의 피질부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은 과학 전문용어에 가렸고, 오늘날에는 그저 싱거운 웃음을 자아내는,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에 불과하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친 듯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 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말 것이다.” P.7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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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옛날 사람들은 가슴속에서 피가 솟구치며 뛰는 소리를 들었을 때 거룩한 경외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과학과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오늘날, 심장은 그저 온몸으로 피를 보내주는 정교한 펌프이고, 코는 공기를 들여마시는 파이프이며, 얼굴은 생리적 메커니즘이 모여 있는 계기판일 뿐입니다. 영혼조차 복잡한 뇌 회로와 피질의 전기 신호 작용으로 설명되곤 합니다. 몸의 모든 부분에 꼼꼼히 이름표를 붙이고 나자 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대해 덜 불안해하게 되었고,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이원성 같은 건 과학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운 편견' 정도로 치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요?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는 지극히 시적이고 고결한 순간에, 내 몸 속에서 불쑥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통증을 겪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영혼과 육체는 완전히 하나이자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감미로운 착각은 산산조각이 나버립니다. 아무리 정밀한 과학 용어로 포장해도, 내 의지대로 제어되지 않는 '낯선 물질로서의 육체'와 그 안에 갇혀 어쩔 줄 몰라 하는 '정신' 사이의 묘한 균열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법입니다.
재밌는 건 이 오래된 철학적 고뇌가 요즘 AI와 로봇 시대를 맞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삶에 바짝 다가왔다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 뉴스나 인터넷을 보다 보면, 인간의 표정과 감정을 어설프지 않게 모방하고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AI 로봇의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지능은 뇌 세포의 피질 활동이고 영혼이 정보의 집합일 뿐이라면, 데이터를 학습한 AI 알고리즘 역시 '영혼'을 가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의식을 디지털 데이터로 만들어 서버에 올리는 '마인드 업로딩' 개념까지 언급되는 요즘을 보면, 옛사람들이 고민했던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이제는 '소프트웨어(데이터)'와 '하드웨어(기계)'라는 지극히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되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급기야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렇게 사람처럼 울고 웃는 AI 로봇에게도 '전자인격(전자지위)'이라는 법적·윤리적 권리를 주어야 하는가?"라는 현실적인 논쟁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AI가 스스로 판단해서 사고를 냈을 때 책임을 묻고 손해를 배상하기 위해서라도 로봇에게 법적인 지위를 주자고 말합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아무리 정교하게 감정을 흉내 낸다 한들 그것은 기계적인 계산과 학습의 결과(일종의 기만)일 뿐인데, 거기에 인격을 부여하면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존엄성이 훼손되고 정작 책임져야 할 개발사들이 법 뒤로 숨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매섭게 경고합니다.
이런 복잡한 논의들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역설적이게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아주 원론적인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AI는 수조 개의 데이터를 학습해 완벽한 시를 써내고, 로봇은 지치지 않는 기계 몸으로 인간보다 훨씬 정확하게 작업을 해냅니다. 그러나 기계에게는 결코 없는 것,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것은 바로 '한계를 지닌 육체를 타고났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매끄럽고 완벽한 알고리즘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아프고, 노화하며, 끝내 소멸하고 마는 시한부의 육체 속에서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태어납니다. 사랑을 느낄 때 가슴이 터질 듯 뛰는 생물학적 요동,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몸 전체로 밀려오는 물리적 고통, 그리고 그 한계 속에서 찰나의 순수한 기쁨을 찾아내는 몸부림이 있기에 인간의 삶은 서정적이고 숭고해집니다. 배고픔도, 죽음의 공포도, 육체의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AI가 아무리 눈물을 흘리는 표정을 지어 보인 들, 그것을 인간의 영혼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결국 밀란 쿤데라의 문장에서 출발해 AI 시대의 전자인격 논쟁까지 이어지는 이 긴 여정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생각보다 단순하고 묵직합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세상을 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 존재의 모든 신비가 다 파헤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뇌의 작동이나 데이터의 계산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영역, 즉 불완전한 몸을 가지고 타인과 부대끼며 감정을 나누는 그 실존적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기계와 구분되는 진짜 이유입니다.
기술이 지능을 증폭시키고 몸을 기계화하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진정 지켜내야 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불완전함'과 '유한함'일지도 모릅니다. 제어되지 않는 육체 때문에 당황하고, 영혼과 몸의 어긋남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타인의 통증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마음. 이 서정적인 잔여물이 남아있는 한, 기술이 아무리 눈부시게 변해도 인간이라는 존재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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